전남 함평 해수찜갯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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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군의 역사

    우리군은 선사시대에는 진국에 속해있었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어 우리 함평에도 1-2개의 소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지석묘(고인돌)와 옹관묘가 군내 전역에 산재해 있으나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있다.
    우리 함평군역은 백제시대에는 굴내현과 다지현의 양현으로 굴내현은 오늘의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대동면 지역이며, 신라와 고려때는 함평현이라 불렀고, 다지현은 현재의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지역으로, 신라 때는 다지현, 고려때는 모평현이라 불려졌으며 무안과 영광군의 속현이었고, 백제시대부터 특정 행정구역인 영풍향과 다경부곡이 있었다.
    조선 태종 9년(1409)에는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하여 함평현이라 칭하였으며 함평현역은 동현내면 ,서현내면, 영풍면, 해제면, 다경면, 대동면, 손불면, 신광면, 평능면, 식지면, 해보면, 월악면, 모동면, 대야면등 14개 면이었다.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자 모평에서 "平"자를 따서 함평이라 했다.

    마을의 지명유래

    ◈ 신설포(新設浦)
    일제 때 주포방조제가 건설되고 구주포가 포구의 구실을 못하게 되자 함평 유일의 해상 교통로로, 그리고 서해에서 잡은 어물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진 포구다.
    원래는 "정포(鼎浦)"라고 했는데 구주포가 폐항되고 새로 설치한 포구라 하여 "신설포(新設浦)"라 불리었다.

    1924년 간행된 함평군지에 신설포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불리운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근은 물론 원지(遠地)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수랑개" "주포"다.
    수랑개란 바다를 막은 간척지여서 진흙탕 즉 수렁탕인 갯가라는 뜻으로 불리운 이름이다.

    수랑개는 수렁개의 사투리이며 주포라는 이름은 주막이 많은 포구라는 데서 붙여졌다.
    함평만에서는 이곳에서만 잡히는 엽삭이란 특종고기가 있고 황실이(강달어), 준치가 잡히며 칠산바다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혔는데 이러한 어획물이 집산되는 곳이 주포였다.

    따라서 어선이 대형화되기 이전인 1955년까지는 크게 번창하여 수많은 주막이 있었다.
    그래서 신설포는 주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그 별명은 이제 본 지명으로 바뀌었다.

    ◈ 덕흥(德興)
    이 마을은 1900년대(1914년 행정구역지명)에 이루어진 마을로 흔히 이민촌이라 부른다.
    현재 김해김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개촌은 성재의 최씨들이 하였다고 한다. 덕이 일구어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덕흥(德興)이라 하였다.   

    ◈ 성재동(成才洞)
    원래 이 마을은 신흥(新興 1789 지명)이라 부른 것 같으며 현 김용식 소유의 집터에 성재사(成才寺, 200여년전까지 있었다고 전함)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을 성재동이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은 현재는 목장마을이 되었는데 1987년 목장을 일굴 때 백제토기 여러 점이 발굴되어 신고된 바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일대에도 백제 때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성리의 마을 중에서 개촌 연대가 가장 앞서는 마을이기도 하다.

    ◈ 석두(石頭)
    이 마을은 1789년 호구 총수의 지명에 돌두리(乭頭里)로 표기되어 있다.
    또 1912년의 행정구역명에는 석두(石頭)로 바꿔져 있다. 함평에서 오래된 포구인 석두포(石頭浦)가 있던 마을이다.
    그러나 서해가 융기됨으로 하여 모래가 밀려와 포구의 구실을 하지 못한 지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돌두(乭頭)는 돌머리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 서편 1km 지점에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돌머리라 하였다.
    근년에 굴 양식장을 개장하면서 기암괴석을 폭파하여 운치를 잃고 말았으며 농바우 전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달랠 뿐이다.

    또 이곳 돌머리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우단이 있었는데 해안초소가 들어서면서 자취가 없어졌다. 석두 입구에서 백제시대의 대형 옹관이 출토되었던 바 이곳에 어로와 농경생활을 하던 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 성곡(成谷)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인 1920년경에 성촌(成村)된 마을로 원래는 석두(石頭)에 속했었다.
    마을을 이룰 때 수많은 백제 토기와 옹관묘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오랜 옛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에 대해 전해오는 말은 없다.

    ◈ 청학동(靑鶴洞)
    이 마을은 일명 뙤밭등이라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해왔으나 1955년 외국의 봉사단체인 케아의 구호 지원으로 6 25동란 때 난민 정착지로 선정되었다.
    재산을 잃고 방황하는 난민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주택자재를 비롯하여 구호양곡을 지원받아 1차 20호, 2차 13호, 3차 10호를 건립, 신생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설립에는 설립자인 이재권의 숨은 공이 많았으며 이 마을 이름도 설립자의 꿈에 학이 이 마을에 앉아 푸른 서해 함평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상기해서 "푸른학"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이다.

    ◈ 성덕(成德)
    현재 마을이름을 "成德"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聖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마을 앞에 임진란 때 토성(土城)을 쌓았기에 성안의 들을 성들이라 부른데서 성자가 연유되었기에 실은 재성자(城)를 써야 옳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